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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  조선 중종 ( 中宗 ) 의 원비 ( 元妃 ) 단경왕후 ( 端敬王后 ) 신씨 ( 愼氏 ) 의 능이다 .
    왕후는 연산군 때 좌의정이며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 ( 愼守勤 ) 의 딸로 , 1499 년 ( 연산군 5) 13 세로 진성대군 ( 晉城大君 ) 이던 중종과 가례를 올리고 , 반정 ( 反正 ) 으로 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나 반정과에서 반정 주체세력이 신수근 을 살해하고 왕에게 강권하여 폐출시켰으며 왕후는 1557 년 ( 명종 12) 사저에서 71 세로 승하하여 신씨 묘역에 묻혔다가 1739 년 ( 영조 15) 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경 , 능호를 온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.
    뒤에 곡원 ( 曲垣 ) 을 두르고 석양 ( 石羊 ), 석호 ( 石虎 ) 각 2 필로 호위하게하였고 능 앞에는 상석 ( 床石 ) 과 장명등을 세우고 망주석 ( 望柱石 ), 문석 ( 文石 ), 마석 ( 馬石 ) 을 배치하였다 . 동물 모양의 조각을 반으로 줄인 것 은 비릉 ( 妃陵 ) 으로 봉해진 무덤의 예에 따른 것이다 . 무덤 아래에는 제사지내는 방 ( 재실 ) 이 있었으나 1970 년 도로확장 때 없어졌다 .
    중종의 첫 번째 왕비인 단경왕후 ( 端敬王后 ) 신씨 ( 愼氏 ) 의 묘소이다 . 영조실록 15 년 (1739) 3 월 28 일조에 의하면 , 신비 ( 愼妃 ) 의 시호를 단경 ( 端敬 ) 이라 하고 , 능호 ( 陵號 ) 를 온릉 ( 溫陵 ) 이라 하였으니 , 단 ( 端 ) 이란 예 ( 禮 ) 를 지키고 의 ( 義 ) 를 지키는 것이며 , 경 ( 敬 ) 이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공경하고 조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다 .
    단경왕후는 1499 년 ( 연산군 5) 진성대군 ( 晋城大君 ) 과 혼인하여 부부인 ( 府夫人 ) 에 봉해졌는데 , 1506 년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 . 그런데 반정 과정에서 부친 신수근 ( 愼守勤 ) 이 연산군 축출에 반대하여 반정군에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. 공신들은 반정을 성공시킨 뒤 후환을 두려워하여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 하여 폐출시키고자 하였다 . 신씨는 왕후에 오른 지 7 일만에 폐출되었다가 승하한 뒤에는 여주 서산 ( 西山 ) 의 수회동 ( 水回洞 ) 북쪽 언덕에 묻혔으며 , 1739 년 ( 영조 15) 복위 되었다 .
    온릉이라는 이름은 18 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 (1706) 에서 처음 등장하며 , 조선 왕조실록과 고종순록실록에서는 총 66 건의 기사가 확인된다 . 영조실록에는 신후담 ( 後聃 ) 이 편집한 온릉지 2 권이 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. 또한 단경왕후 신씨가 복위된 후 온릉에 대한 정비와 제사가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. 영조는 15 년 (1739) 8 월 19 일 일출 때에 온릉에 이르러 작헌례 ( 酌獻禮 ) 즉 묘소에 술따르는 예식을 행하였다 . 정조 23 년 (1799) 은 능호를 지정한 지 60 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, 정조는 특별히 작헌례를 행하였고 , 임금의 장인 신수근 에 대해 마을에 정문 ( 旌門 ) 을 세워 표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.
    그러나 온릉의 사적비는 묘소 정비 과정에서 가장 늦게 조성되었다 . 정조대에 계속되는 조정 신하들의 건의에도 불고하고 , 현재의 사적비는 순조 7 년 (1807) 에 이르러서야 조성되었는데 , 이는 연산군 축출에 반대한 단경왕후의 아버지 신수근 의 행적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.
    온릉은 철종대 이후 관리가 소홀해지기 시작하였다 . 철종 행장에는 온릉의 나무를 베어낸 일이 적발되어 관련 관원을 족파직시켰다는 기사가 있으며 , 고종대 에는 온릉 재실 ( 齋室 ) 의 당직자가 쓰는 물건이 도적질되거나 묘소 주변에 불이 나기도 하였다 . 산 19 번지에 있다 .

    꽃 이미지